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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포기하십시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5-02 07: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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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줄 알아야 성공한다



신동화
국제법률연구원 / 원장




포기하지 말라는 말. 넌 할 수 있다는 말. 상대의 가능성을 믿는 말에 용기를 얻어 더욱 분발하는 사람이 많다.

적절한 시기에 어떻게 포기를 하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
모든 꿈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현가능성이 낮은 꿈을 포기하고 실현가능성 높은 꿈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애정을 가지고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포기해 본 적 있는가?  포기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정신적 괴로움이 없어져 새로운 일을 선택하여 새롭게 시작하기 수월해진다. 하지만 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포기하겠다고 수십번을 다짐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거기에 얽매여 지배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포기를 하면 얻게 되는 것들이 많다.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목 좁은 항아리 속에 있는 사탕을 먹기 위해 손을 비집어 넣어 사탕을 움켜 쥐면, 사탕은 커녕 자기 손조차 뺄 수 없게 된다.
움켜쥔 사탕을 포기하고 손을 펴면 손을 뺄 수 있고, 그 손으로 항아리를 뒤집어 사탕을 꺼낼 수도 있다.

포기란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결심이다.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비효율적인 것을 버리는 것인데, 그 버릴때의 아까움 때문에 포기를 주저하게 된다.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시점, 자기 능력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시점에서 사람들은 포기하면서 실패와 좌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포기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와 포기로 인한 선택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
포기하지 못하면 기대와 현실이 충돌하여 괴로워진다.
사람들은 포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같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시점에서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포기해야 할 때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나은 경우가 많다.

인간의 힘은 한정되어 있기 떄문에 힘을 비효율적인 것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
비효울적인 일은 빨리 포기해서 남은 힘을 다른 효율적인 것에 사용하도록 전환하는 비효율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일을 접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능력이나 집단 속에서의 역할, 지위가 차츰 명확해진다. 역할이 결정되면 행동해야 할 방향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차츰 타인과 다른 ‘나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다운 인생’이라는 주제에는 ‘포기’와 ‘성공’ 모두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포기로 도전을 반복함으로써 그 결과가 축적되어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 자신의 장점과 단점, 가능성과 한계가 드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예측하는 힘도 길러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험을 쌓고 자신의 능력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이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 인식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에너지 낭비만 하는 일을 피하지 못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어떤 일에든 도전하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자신의 능력이 집단 속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한계를 파악함으로써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다.

과감하게 포기하면 자신의 본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때를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노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했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아서’라면서 포기 프로그램을 발동시킬 수 있는 찬스라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하되 에너지 소모가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처럼 포기는 본래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고 에너지의 헛된 낭비를 막아주며 진화를 촉진시키고 집단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능동적인 프로그램이다.

에너지가 넘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포기하기도 쉽고, 최적의 방법을 찾는 데도 그다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에너지가 고갈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 번 전환하기에도 벅차다. 또 한 번 실패하면 정말로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것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전환하기가 두렵워 어떻게든 견디면서 이대로 끌고 나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원시인에게는 에너지를 얼마나 적게 소모하느냐 하는 것이 목숨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귀중한 에너지를 결코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것이 ‘생명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식량이 넘쳐나는 현대인에게도 이 DNA는 계승되어,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늘 인식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생명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우리의 신체뿐 아니라 감정이나 사고 패턴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생명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항상 ‘지금은 에너지 위기상태임’이라는 지령을 내린다. 그래서 어떤 일을 포기해야 할지 계속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우면 일단은 현재의 일을 계속하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방향 전환에 따르는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불안감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도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를 주저한다.

현대인이 포기에 실패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이 생명 에너지 보존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포기는 본질적으로 비용 대비 효과의 균형이 깨질 때 발동한다. 효과란 어떤 행동을 계속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며, 비용은 이 효과의 창출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다.
이처럼 포기란 단순한 작업이지만, 이런 단순한 도식은 포기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만 적용된다. 진화된 포기 프로그램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행동하기 전, 또는 행동하는 도중에 항상 ‘향후 작업의 진척 상황’과 ‘자신의 능력(이미지)’을 저울의 양쪽에 올려놓고 저울질한다. 저울의 움직임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이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 없을까를 예측한다. 이 예측이 부정적이면 그 시점에서 작업을 중단한다. 그럼으로써, 작업을 계속하면 헛되이 소모될지 모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매우 비효율적인 작업처럼 보일지라도 본인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할 수 있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 작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 포기저울은 작동하지 않는다.

포기 프로그램이 어딘가에서 오작동을 하는 이유는 ‘미래의 포기저울’에 놓여 있는 저울추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울추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해 보면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꾸 말에 토를 달아 미안하지만) 사태는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실제로는 ‘고통 프로그램’과 ‘행복 프로그램’이 포기 프로그램 저울의 움직임에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는 ‘행복과 포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종 목표의 틀 안에서 포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포기의 활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그것을 종합해볼 때 행복은 다음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으로 ‘자극’이나 ‘쾌감’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또 하나는 ‘촉촉하게 젖어 오는 행복’이다.

자극과 쾌감의 행복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유익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쁨이다. 쾌감은 항상 고통과 함께 움직인다. 그러므로 쾌감, 즉 행복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알아야 한다. 먼저 고통 프로그램의 기본형은 고통 프로그램의 볼륨업 기능을 이용하여 욕구를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이 커지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을 취하게 된다. 만약 이 고통 프로그램의 볼륨업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사태를 감지하지 못한다. 고통은 생명 유지나 생식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항상 감시하면서 사태를 감지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행동하게끔 만드는 시스템이다.

욕구는 넘치지만 불행히도 우리 몸은 하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욕구가 한꺼번에 용솟음치지만 행동할 수 있는 몸은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을 마주한 이상, 고통이 큰 순서대로 욕구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고통의 순위 매기기 기능이다. 순위가 정해지면 가장 순위가 높은 것부터 하나씩 욕구를 해결해가면 된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쾌감은 고통과 짝을 이룬다. 쾌감은 고통 프로그램의 ‘부족한 욕구를 우리 몸에 전달함으로써 행동을 일으킨다’는 기본 기능과 관계가 있다. 어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고통을,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에는 쾌감을 느낀다. 고통과 쾌감이 협력함으로써 행동을 조절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이런 행복에는 한 가지 한계가 따른다. 욕구가 간단히 해결되는 환경에서는 고통도 적을 뿐 아니라 만족감(행복)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쾌감의 한계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이것을 기본선이라고 부르자)이 넘으면 이런 현상이 생긴다. 생명 유지를 위한 최저 수준 이하에 놓여 있다면 그 상황에서 탈출함으로써 극적인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본선 이상인 경우에는 욕구가 채워져도 그렇게 큰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살고 죽는 문제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어떤가? 모두가 더욱 편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은 기본적인 고통에서 상당히 해방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풍족한 사회가 되었다. 기본선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쾌감과 자극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늘 욕구불만에 싸여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촉촉이 젖어드는 행복을 맛보게 해주는 진화된 행복 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면 항상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비록 자극적인 생활을 하면서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기는 하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이런 행복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안정된 삶도 조금씩 흔들리고 만다. 이런 경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 엄습해오는 적이다. 그래서 현대인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쾌감이 아니라 촉촉이 젖어드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과 꿈(목표)의 관계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 무의식중에 존재하는 꿈이나 목표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할 꿈이나 목표를 쫓느라 인생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능성 없는 꿈을 접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꿈을 추구하며 인생을 보내는 쪽이 훨씬 행복하다.
의식주나 안전, 성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 최종목표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일맥상통한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행동들은 인간의 최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간목표’이다. 이런 중간목표의 존재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종종 혼란에 빠뜨린다. 중간목표는 최종목표에 좀더 쉽게 도달하기 위한 가교 역할을 한다. 일단 중간목표를 이루면 최종목표에 도달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 전략은 수시로 변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직접 최종목표를 추구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의 DNA를 존속시켜주었다.

보통 중간목표는 최종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밟는 하나의 단계다. 그러나 중간목표가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경우, 현실에서는 최종목표와 비슷한 크기로 다가오거나, 때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욱 강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중간목표가 귀찮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최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중간목표를 건너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중간목표는 노력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인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중간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자신을 무능력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최종목표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이 중간목표를 간단히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 프로그램이 아닌 행복 프로그램을 작동시켜야 한다. 행복 프로그램을 충분히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목표와 계획,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목표를 향해 순항하고 있다는 인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어떤 목표를 향해 행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자신에게 맞는,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선택하는 일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중간목표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으로는 자신의 의지대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목표설정 단계에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중간목표가 ‘도중에 그만두지 못하는’ 오작동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오작동은 다른 요소들과도 관계가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집단 속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중간목표에 질질 끌려 일으키는 오작동은 카운슬러인 나로서도 매우 풀기 힘든 과제다.
본질적으로 우리에게는 노력하지 않으면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노력하면 모두에게서 인정받는다는 의식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러므로 포기에 서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이혼율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으며,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전직을 하는 사람 또한 해마다 늘고 있다. 그만큼 ‘도중에 그만둔’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도 늘었다. 우연히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겹치면 자기혐오감은 극에 달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책망하는 강도도 높아져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이 포기 프로그램이 일으키는 최악의 오작동이다.
현대사회는 포기를 경멸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다. 지금까지 이 사회를 지탱하던 ‘필사적인 노력’의 미덕은 점차 그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하나밖에 없던 시절에 살아남기 위한 생활의 지혜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성공을 위해서는 참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덕목은 필사적인 노력만이 전부가 아니다. 밝고 경쾌함이나 자기다움 등 그 덕목은 다양해졌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환경에 놓인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참고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야 하고 노력할 수 있는 분야, 즉 귀중한 에너지를 쏟아 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를 선택하는 능력이며, 자신이 선택한 삶과 행복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능력은 반드시 포기 능력을 동반한다. ‘참고 견디는 능력’은 미덕으로 남겨두어도 좋으나, 그것이 포기 프로그램의 작동을 방해한다면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시대에 뒤처지고 만다. 이 시대는 적절한 포기 능력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사회다.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두세 가지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 짧은 시간에 기억할 수 있는 양은 많아야 일곱 가지 정도다. 교육현장에서 이런 사실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선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치려고 애를 쓰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오히려 몇 가지로 정리하여 전달하는 편이 학생들이 기억하기에 훨씬 쉽다. 현대인의 ‘결정하지 못하는 오작동’이 일으키는 괴로움의 근본은 여기에 있다. 흘러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선택을 머뭇거리는 것이다.
‘결정하지 못하는’ 오작동은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데서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농경 주체의 집단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이고 모두가 하는 대로 해야 안심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개성을 발휘하고 싶다든가 자유롭고 싶다는 인간의 본성이 허락되는 시대다. 즉, ‘개인’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개인의 자유가 인정되고 개인의 책임으로 행동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움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동료에게 따돌림을 당할 위험도 크고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불안도 떨쳐버릴 수 없다. 걱정이 커질수록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타인의 잣대에 의존하는 경향도 커진다. 이것은 타인 중심의 삶이다. 그러나 타인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므로, 타인 중심으로 살다 보면 내 삶이 피곤해진다.
집중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전력이 금방 분산되기 쉬운 인간의 약점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틈새가

보이는 모든 곳을 공격하고 싶은 충동을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되는 곳을 자신의 책임 범주 안에 넣고 여기에

힘을 집중한다. 이것이 살아남기에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한 곳에 집중하는 작업은 고통 프로그램으로 욕구의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과도 직

결된다. 그때에도 가장 치열한 욕구에 ‘집중의 원칙’을 이용하여 힘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목표를 향해 힘을 집중하는 전략’이

미래의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생존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행복 프로그램이 입력된다. 이럴 때 가장 불안을 덜

느끼고 살아 있다는 기쁨에 충만해진다. 이렇게 하나로 집결시키는 일, 즉 선택하고 결심하는 일은 행복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

다.


매스컴이 발달한 덕분에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매일매일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온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화면을 장식한다. 그에 비해 자신은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하

는’ 오작동 패턴이다. 이 오작동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만두지 못하는 오작동도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역할’이다. 이것은 비교 프로그램과 연동하여 우리가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방해한다. 두 사람 사

이에서 애매한 일이 생겼다. 그러면 서로가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서로에 대해서 느끼는 역할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으면 이를 둘러싸고 치열

한 접전이 펼쳐진다. 만약 부당한 일을 강요당했는데도 정당한 항의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부당

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할 뿐 아니라, 생명이 위험(실체는 없더라도)에 노출된 상황에 빠졌는데도 그곳에서 헤어 나올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참고 견디는 작업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역할을 포기하면 행동이 가벼워진다. 문제의 원인이 된

일을 해결하는 데 죽을 만큼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은 없다. 역할을 포기하자. 그러면 분노도 가라앉으며 인간관계도 호전될 것이다.
예로부터 사랑의 상실감은 감당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있는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

런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마저도 현대사회에서는 오작동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오작동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괴로워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사랑의 오작동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생활방식이 편할 때가 많다. 밀접하게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이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지배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그런 행위가 자식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조장하는 원인이 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악순환이다. 이처럼, 부모는 이래야 한다, 자식은 이래야 한다,

남편은 이래야 한다는 등의 ‘역할’ 저울추에 ‘사랑’이 더해지면 포기저울의 불균형이 더욱 심각해진다.

어찌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한 우리는 필사적으로 ‘포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좀처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그것에 매달리고 끌려 다

닐 때가 많다. 심하면 그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그 때문에 자신감을 잃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는 경우까지 있다. 포기

프로그램은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이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중간에 어떤 행동을 그만두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의 낭비를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실패하면 포기 프로그램이 오작동을 일으켜서 비록 그 행위를 멈추었다 하더라

도 결과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커진다. 에너지 소모가 극한 상태에 달하면 포기 프로그램은 단순히 ‘어떤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칫 ‘인

생’ 자체를 포기하는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절망 프로그램’ 오작동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것이 포기 프로그램이 일으키는 최악의 오작동이

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들이 오작동을 일으키는지 살펴보자.
‘잊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작동의 주역은 ‘자책 프로그램’과 ‘잊어 버리자’식 대처다. 이 두 가지의 상승작용으로 우리는 과거에 끌려

다니며 소중한 에너지를 계속 소모한다. 내가 원인이라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내 탓이 아니라면 사태를 처리할 수단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든 것이다. 이

자책이 ‘잊어버리자’식 대처와 결합하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사슬이 되기도 한다.
억지로 ‘잊어버리자’식 대처법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의식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떠올리

기조차 두려운 대상이라면 그 형상은 더욱 선명하게 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잊어버리자’식 대처법의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분석사업이 중지된

다는 점이다. ‘잊어버리자’식 대처로는 정보를 모으기 힘들다. 게다가 적절한 처리가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자책이 아닌 ‘사태의 분석’으로 발

전하지 못한다. 지금은 괴롭지만 일시적인 고통을 겪을지, 당장은 덜 아프지만 미래의 걸림돌을 치우지 못해 피곤한 인생을 보낼지, 선택은 당

신에게 달려 있다.

현대사회는 급속히 성과주의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DNA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미리 계산하면서 핸들을 꺾지 않으면 급격한 커브를 제대로 돌지 못한다. 급커브를 제대로 돌지 못해 충

돌하는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은 하나의 포기를 전체의 포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자신감과 의욕을 상실하여 결과적으

로 자신 앞에 놓인 미래의 가능성마저 헛되게 만드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또 다른 패턴은, 심각한 정신피로에 시달릴 때는 일단 레이스를

벗어나 포기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는데도 이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 우울증으로까지 추락하는 경우다. 심하면 자살로

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매우 위험한 오작동이다.

포기 프로그램을 발동시켜야 할 시점에서 발동시키지 못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지속되는 경우, 우리는 의지를 동원해서라도 포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감정이 자연스러운 포기를 유도하지 못한다면 머리가 ‘포기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 즉, 효과적인 포

기 기술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과적이고 현명한 포기 기술
‘포기’라는 말만 들어도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면, 어떤 일도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포기란 지금의 활동이 비생산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다음 활동을 위해 현재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말하자면 자동차 브레이크와 같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에는 누구도

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포기는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자’ 하는 매우 적극적인 프로그램이다. 포기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 이것이 포기를 경멸하고 터부시하는 태도가 몸에 밴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머릿속 작업이다. 포기하려는 자신에게

겁쟁이라든가 나약한 인간이라든가 근성이 없다든가 하는 꼬리표를 달아서는 안 된다.

포기라는 작업에 대해 머릿속 정리를 끝낸 사람이라면 이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포기는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 고통은 무엇을 잃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갈등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것을 포기함으로써 무엇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선택, 즉 포기이다. 자칫 잘못하면 중간목표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우리의 선택과 미래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느낀

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위해 거쳐야 하는 제일 첫 번째 과정이다. 포

기저울에 올려 있는 저울추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면 냉정하게 자기가 선택해야 할 길이 보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인간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행위는 주위의 정보를 모으는 데도 효과가 있다. 인간이 냉정을 회복하면 이성적인 판단으로 포기가 가능하다. 무엇을 선택할지도 확

실히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에 휩쓸리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가능하면 사정

을 모르는 제3자가 좋다. 서툰 조언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처음부터 되짚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사정을 몰라 당신의 회상에 끼어들지 않을 만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냉정한 자신을 찾는 경우가 많다. 딱

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면 카운슬러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그러는 편이 포기를 위해 술집을 드나들며 돈을 쓰는 것보다는 낫다.

포기를 이유 없이 경멸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정보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정보를 적절히 응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점과 대책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울 때 혼자서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최악의 연쇄 사고나 색안경

관점이 끝없이 폭주한다. 그러면서 자책 프로그램과 연쇄반응을 일으켜 심하게 자신을 질책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잊어버

리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 결과 ‘잊지 못하는’ 오작동까지 연쇄 충돌하여 피곤한 인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

므로 침울할 때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안정을 되찾고, 객관적인 사고와 시점을 회복해야 한다.

요컨대 당신이 무언가를 포기하려고 할 때는 먼저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고,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거나, 비슷한

입장에 놓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문제에 대한 정보를 모으거나 하면서 발버둥쳐보기 바란다. 그러면 고통 프로그램이 적절히 움직이기 시

작하면서 포기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기 위한 에너지가 솟아날 것이다.

정면으로 가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하산하는 용기, 회항하는 용기를 가진 자야말로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남자들에게는 이런 문구가 상

당히 효과를 발휘하지만, 여성은 다르다. 조금 다른 설득법이 필요하다. 여성은 휴식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경향이 남자에 비해 강하다

. 자책감으로 괴로울 때 쉬기까지 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한심스러운 인간이 되고 말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고통을 당해 마땅하며, 편하고 즐거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이런 사람에게는 휴식을 취하거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을 ‘에너지 보급’이라는 표현을 써서 설명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피로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피로가 많이 쌓여 있는 경우라면 삶의 보람을 운운하기에 앞서 우울증 극복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미래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늘을 즐겁게 사는 수밖에 없다. 특별히 즐거운 일이 없어도 괜찮다.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혹은 두려워했던) 나쁜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쌓아가면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준다. 나는 이것을 ‘행복 저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므로 당신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초조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부디 오늘부터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하기 바란다. 오늘 누구와 만나는가? 오늘 무엇을 하는가? 오늘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는가? 오늘을 충실히 보내면 내일의 불안은 사라진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일단은’ 발상이다. ‘일단 오늘은 이 일을 하자.’, ‘일단 잠자고 나서 생각하자.’ 계획적이 아니어도 좋다. 지금 생각나는 일 중 하나를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결하면 된다. 그런 시간들을 쌓아간다고 마음먹자. 그러면 오늘을 생각하는 동안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사라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포기를 너무 쉽게 너무 자주하는 사람은 오히려 ‘포기하지 마!’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지금까지의 교육이나 문화의 전통을 소중히 해 주기를 바란다. 무엇이든 포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므로.

‘포기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다.
능숙하게 포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피로가 축적되어 있을 때는 결단력이 둔해진다. 에너지가 풍부할 때는 한 가지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내어 행동에 옮기기가 쉽다. 그러나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는 재도전 자체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향해 매진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해 고민 중인 사람, 지금의 삶이 고통으로 뒤덮여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데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이밍이 늦으면 늦을수록 인생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멸된다.
비용 대비 효과가 나쁜 도박에서는 1초라도 빨리 손을 떼야 한다. 타이밍이 너무 늦어 손을 쓸 수 없게 되면,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삶 자체를 포기하고 마는 극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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